[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35] 영화 <장기자랑>▲ 영화 <장기자랑>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아이들의 모습이 담은 작품을 마주하고 나면 마음이 이상해진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순수하고 섬세한 감정을 어떻게 옮겨와 담아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2016),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2020), 이지은 감독의 <비밀의 언덕>(2023)과 같은 영화다. 여러 경로를 통해 포착한 또 다른 아이들의 모습을 각자의 시선으로 프레임 위에서 풀어낸 것임을 안다. 이제는 흐릿해져 버린 어린 시절의 마음과 모습을 선명하게 어떻게 이토록 잘 그려낼 수 있었을까. 어쩌면 시간을 되돌아갈 수 있는 비밀 장치가 이들에게는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정선 감독의 영화 <장기자랑>(2023) 역시 그런 작품 가운데 하나다. 영화는 어린 시절 찍어 둔 비디오 속 자신의 장기 자랑 모습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잘하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았던 개인기를 왜 잘할 때까지 연습해야 했는지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했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박수치며 환호하던 관객석의 부모를 위해서였을까. 영상 속에 남아 있는 무대 위 어린아이는 하기 싫은 표정으로 가득했다.
이 작품은 그런 아이에 대한 이야기다. 잘하지 못하는데 왜 자랑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친구. 지금 무대에 오르는 일보다는 아직 매듭짓지 못한 일을 먼저 정리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
02.
"너 장기 자랑할 거 정했어?"
연후(김건우 분)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 어렵다. 특별히 잘하는 일이 없어서다. 협동을 요구하는 체육 시간은 특히 더 그랬다. 의욕도 없고 잘하지도 못하는 그를 친구들이 수군대며 피하고 놀리는 건 예사다. 연후가 관심이 있는 건 오로지 개구리. 쉬는 시간마다 수조 안의 개구리를 지켜보며 혼자 시간을 보낸다. 그런 그에게 곧 다가오는 학예회는 큰 고민이 된다. 벌써 무리를 정해 연습을 시작한 다른 아이들과 달리, 연후 혼자서만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할 줄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이때, 반장 민지(이가은 분)가 먼저 손을 내민다. 멜로디언 연주를 같이 해보자는 제안이다.
쉬는 시간마다 모여 연습에 몰두하는 아이들. 이들 사이에는 약간의 경쟁심도 생기는 것 같다. 무대 위에서 누구보다 돋보이고 싶은 마음이다. 처음에는 민지도 연후에게 열었던 자신의 마음이 갈등의 씨앗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연후는 이번에도 멜로디언이 고장 났다는 이유로 연습을 미루려고만 한다. 부족한 자신감이 행동을 지연하고 그만큼의 시간을 벌기 위한 변명이다. 잘하지 못하는 것을 누군가에게 자랑해야 한다는 것조차 이해하기 어렵다.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의 입장이 다툼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감독이 포착해 내는 것은 연후의 마음만이 아니다. 민지의 선의 또한 중요하게 다뤄진다. 멜로디언을 연습하는 일로 다투게 되기는 하지만, 어떤 형식으로든 함께 나아가기 위해 손을 내미는 모습은 영화 속 인물 사이에서 의미적으로 활용된다. 아직 어려서 그 방법이 다소 서툴기는 하지만, 자신의 이해와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금방 등을 돌리는 어른들의 사정에 비하면 순수하고도 따뜻한 행위다. 그리고 이 행동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민지가 연후로부터 다시 되돌려받는 형태로 개인의 성장과 관계의 발전을 도모하는 장치가 된다.
▲ 영화 <장기자랑>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03.
"지금 이런 올챙이가 중요하냐?"
이 영화에서 개구리와 연후는 서로 마주 보는 대상이다. 누군가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대상인 개구리는 친구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연후와 오버랩된다. 그가 개구리를 좋아하는 이유 역시 감정적 공유로부터 시작되는지 모른다. 처음의 장면에서 개구리가 아닌 성장 과정에 놓인 올챙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역시 그렇다. 성체가 되지 못한 개구리의 모습은 아직은 작고 여린 연후와 닮아있다.
마지막까지 개구리와 연후가 같은 자리에 놓인 채로 남겨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 시간의 해부 수업을 통해 연후는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 깨닫게 된다. 개구리의 죽음과 이를 정확히 마무리 짓고자 하는 그의 모습은 성장을 위한 피할 수 없는 순수한 과정에 해당한다. 무대 위의 외면과 타인의 환호가 아닌 자아의 발견과 정체성의 정립으로 인한 내적 성장이다.
이 과정은 영화의 초중반부를 통해 상대적으로 앞서 있다고 여겨진 민지와 다른 친구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열이 난다는 거짓말로 해부 수업을 빠지고 싶어 하던 민지의 모습은 체육 시간의 연후의 모습 또한 이상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길 수 있게 만든다. 서로 잘하는 것이 다르고 누구나 각자 어려운 일이 있을 뿐, 틀린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영화 내내 눌려있던 연후가 디딜 수 있는 자리가 그렇게 마련된다. 누구에게나 낮은 자리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04.
캠코더 속의 아련한 영상을 통해 아이들의 장기 자랑이 보인다. 그 장면 속에는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연습을 자신 있게 선보이는 아이도, 자신은 없지만 용기 있게 무대를 오른 친구의 모습도 모두 담겨있다. 이를 지켜보는 무대 아래 학부모들의 성원과 응원의 목소리도 함께다. 멜로디언 친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담임(임예은 분)의 소개하는 모습 이후로 영상은 끊기고 만다. 연후와 민지가 무대를 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피하고 싶어 했던 적은 있었지만 그 일 앞에서 도망친 적은 없었으니까. 실수는 많이 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두 친구의 연주 장면이 아닌 무대 아래의 모습을 선택한 것은 이제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연출자, 관객, 극 중 두 아이에게 모두 그렇다. 캠코더의 기억 장치 속에 보관되는 것과 마음속에 남겨지는 것의 의미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우리는 실패와 고난, 상실과 슬픔을 딛고 성장하기도 한다. 이 작품 속 두 아이가 경험하게 되는 것이 그리 대단하게 여겨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여물지 못한 세계의 경도와 크기를 생각하면, 엄습해 오는 감정과 상황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고 한 발 내디디던 오늘의 경험은 이들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하고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운영 중인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는 2024년 2월 15일(목)부터 총 18개의 큐레이션을 통해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선정작 92편(장편 22편, 단편 70편)을 소개/상영할 예정입니다. 열여덟 번째 큐레이션인 '모서리에서 만난 우리'는 11월 1일부터 11월 15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 가입 후 무료로 시청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