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 ‘타인의 삶’…그리고 지금, 달라진 나의, 삶

3377TV정보人气:138시간:2024-09-25

동그란의 마음극장
‘타인의 삶(The Lives Of Others)’
영화 ‘타인의 삶’의 한 장면. 라이러리컴퍼니 제공
개봉 당시 잔잔한 화제가 되었던 영화 ‘타인의 삶’(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 2007)이 17년 만에 재개봉을 한다고 해서 기대를 잔뜩 모으고 있습니다. 좋은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죠. 하지만 기다리지 못하고 이번에도 역시 OTT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통일 전 동독의 비밀경찰로 냉정하고 집요하기 이를 데 없던 비즐러가 명망 있는 극작가 라즐로를 감시하면서 인간적으로 변모해가는 과장을 실감나게 그린 영화로 기억하고 있었는데요. 자신을 빈틈없이 감시한 비즐러의 존재를 통일 이후 2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는 라즐로는 그에게 바치는 책을 써서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죠. 자신을 감시한 비밀경찰에게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라는 제목의 책을 바치게 되는 사연이 영화의 주요 줄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7년 만에 다시 본 ‘타인의 삶’은 구석구석 완전히 새롭더군요. 영화가 달라졌다는 게 아니라, 그걸 보는 제 눈이 달라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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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친구 같은 주인공들
우선 주인공들이 가깝게 느껴졌어요. 통일 이전의 동독이라는 무대를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아주 멀게 느꼈던 2007년과는 달리 지금은 1984년의 동독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어요. 어쩌면 그사이 독일을 몇 차례 다녀온 덕분인지도 몰라요. 공원의 돌멩이 하나도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고, 낙엽도 무슨 생각이 있어서 떨어지는 것 같은 분위기가 화면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전해져왔죠. 영화의 주인공인 남녀도 예전과는 다르게 아는 사람들처럼 느껴져요. 50번째 생일을 앞둔 있는 극작가 라즐로와 그와 함께 사는 여배우 크리스타는 이제는 내 친구처럼 느껴져요. (예전에 봤을 땐 너무나 까마득해 보이는 중년의 남녀였지요. 저 나이에도 저렇게 열정적인 사랑을 할 수 있나, 하고 의문을 품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들을 감시하는 비밀경찰 비즐러! 이 사람이 가장 놀라워요. 그는 내가 알던 외로운 대머리 아저씨가 아니었어요. 이제 보니 그는 진정한 실력자더군요. 그도 라즐로 커플과 동년배이지만 몸이 퍼지지도 않았고 촉이 무뎌지지도 않았어요. 탁월한 심문 기술과 섬세한 감청 능력은 물론 상황 대처능력과 통찰력 등이 일생 중 최고조에 달한 베테랑 비밀경찰인데요. 어째서 17년 전의 내 눈엔 유약한 중년 남자로만 보였던 걸까요. ‘당의 칼과 방패로 살아간다’는 확고한 직업적 신념 아래 성실히 전진해온 그는 이번에 맡은 ‘라즐로 작전’만 상관의 입맛에 맞게 성공시킨다면 출셋길은 따 놓은 당상이었습니다. 그에게 이 일은 전혀 어렵지 않고, 어쩌면 너무 간단했어요. 도청장치는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었고 라즐로와 그의 연인 크리스타는 대화가 많은 커플인 데다 친구들도 많아서 가만히 앉아 듣고만 있어도 정보가 흘러넘쳤죠. 그래서 그는 그들을 좀 봐주고 거들기도 하면서 체포의 순간을 점점 연기하게 되지요.

영화 ‘타인의 삶’의 한 장면. 라이러리컴퍼니 제공
크리스타가 아름다운 이유
라즐로가 존경하는 연출가 예르스카는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주변 인물이에요. 그는 당에 밉보여서 연출 활동을 금지당한 채 집에만 있는데 그의 울분에 찬 목소리가 이번엔 제대로 들려왔어요. 책으로 가득한 서재 안에서 술을 마시며 속절없이 늙어가는 노인 예르스카를 안타까워하는 라즐로는 그의 복귀를 간절히 바라지만 크리스타는 생각이 다르더군요. 자신은 강한 남자가 필요하다고, 이제 그와는 가깝게 지내지 않으면 좋겠다고요. 울분에 찬 노인과 가까이해서 좋을 일은 없겠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에서죠. 크리스타는 언제나 지금을 사는 인물이에요. 하지만 그녀에게 ‘지금’이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 같아서 불안이 기본값이에요. 그 위태로움을 견디면서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현재를 지탱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지만 긴장감으로 아름답게 반짝여요.

예전에 내가 본 크리스타는 멀쩡하게 튼실한 독일 여인의 몸으로 나약한 척을 하는 늙은 여배우였는데, 지금의 내 눈에는 너무나 위태롭고 가여운 여인이에요.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도 없이 중년의 여배우가 된 그녀에게 확실한 건 매일 오를 수 있는 무대가 있다는 것뿐이에요. 그날의 관객을 잘 떠나보내고 나면 행복해진다는 사실만이 그녀가 하루하루 손에 쥘 수 있는 모든 것이에요. 라즐로와는 공식적인 관계도 아닌 채 그의 집에 얹혀 지내고 있는 처지예요. 사랑하기에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것을 라즐로는 결코 헤아리지 못할 거예요. ‘뒤를 봐주겠다’며 뱀처럼 파고드는 헴프 장관이 몸서리쳐지도록 싫지만 무대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해요. 라즐로 역시 헴프 장관과 그 수하들에게 혐의를 받지 않는 수준에서 몸을 사려고 비위를 맞춰가며 글을 쓰고 있는데, 그런 그는 깨끗하고 크리스타만 더럽혀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훔쳐도 좋은 것들
예르스카는 이미 현업에서 멀어진 지 오래되어 다시 돌아와도 환영받지 못할 거라는 걸 크리스타를 비롯한 연극계 동료들이 다 알듯이 예르스카 자신도 알아요. (라즐로도 말로만 돌아와야 한다고 할 뿐이에요. 크리스타에게 말로만 사랑한다고 가지 말라고 하면서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가 존경받는 건 10년 전에 이룬 일 때문이고, 다시는 그만 한 능력을 발휘할 수 없고 그럴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영화 ‘타인의 삶’의 한 장면. 라이러리컴퍼니 제공
예르스카는 라즐로의 생일파티에 와서 구석에 혼자 앉아 브레히트의 시집을 읽고 있었어요. 그리고 라즐로에게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라는 악보집을 생일 선물로 건네주죠. 이제는 퇴물이 되었지만, 다음 세대에게 전해줄 것을 잊지는 않았어요. 아끼는 후배에게 시집을 펼쳐서 한 구절을 읽어주고, 악보를 선물해주고, 구하기 어려운 책을 구해주는 것이 가장 큰 우정의 표현이던 그 시절의 풍경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겨요. 우리는 뭐가 그리 바빠서 저런 것들을 놓고 여기까지 숨가쁘게 달려와 있는 걸까, 하고요. 그만큼 세월이 흘렀어요. 그만큼 많은 것이 바뀌었어요.

나 역시 예르스카를 보면서 떠올리는 얼굴들이 훨씬 많은, 그런 나이가 되었어요. 라즐로의 집에 예르스카가 남겨두고 떠난 노란 표지의 시집과 악보 한 권이 이후의 이야기를 얼마나 흥미롭게 펼쳐가는지, 이번에 다시 보면서 처음 느꼈어요. 그 빈틈없고 완벽한 비즐러가 라즐로의 집에 가서 몰래 들고나온 시집을 얼마나 맛있게 읽던지, 그건 절대 훔쳤다고 말할 수가 없는 장면이더군요. 예르스카의 부고를 듣고 라즐로가 연주한 그 악보의 음악을 감청장치를 통해 들으면서 비즐러가 어떤 감동을 전해 받는지, 그 역시 절대 훔쳐 들었다고 할 수가 없는 장면이었어요.

20년 동안 정규직
비즐러는 라즐로를 비호하다가 결국 동창이자 직속상관인 그루비츠에게 내쫓김을 당하게 되죠. 그는 오랜 친구이기도 한 비즐러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벌을 내려요. “용케 증거는 없앴지만 이제 넌 골방에서 편지나 뜯을 줄 알아. 20년 동안!” 17년 전에는 20년 동안 한직이라니 너무 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재능 낭비라고요. 그런데 지금의 나는 생각이 아주 많이 바뀌었더라고요. ‘최소 20년을 보장하는 정규직 일자리라니, 너무 감사하다. 게다가 편지봉투를 뜯는 일이라니, 아주 좋은데?’ 그땐 끔찍한 형벌이었는데 지금은 굉장한 특혜가 되는 이런 변화가 저는 정말 놀라워요.

라이러리컴퍼니 제공
비즐러가 한직으로 쫓겨가고 얼마 안 있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집니다. 달라지는 것은 없어요. 헴프 장관은 여전히 고위직으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고, 라즐로의 작품도 무대에 올려지고 있고, 비즐러는 여전히 우편국에서 일하고 있어요.(정규직의 힘!) 헴프 장관의 말이 맞아요. 그는 늘 말했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냉혹한 비밀경찰 비즐러가 예술가들의 삶을 엿보다가 변화한 이야기라고 이 영화를 설명해요. 하지만 그는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는 늘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을 했어요. 그래서 한 번도 비굴하거나 흔들리는 눈빛인 적이 없었죠.

그가 한 일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것을 돌보는 일이 아니었나 싶어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혼란스럽고, 어디서부터 따져나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당장 내 앞에 있는 이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어떤 것을 함께 돌보는 일이라고 그가 속삭여주는 것 같았어요. 세상이 어디로 가든 우리가 흔들림 없이 지속할 수 있는 일은, 이유는 잘 몰라도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잘 간직해서 전해주는 일일 거예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아껴주는 일일 거예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농담처럼 기적처럼, 감사의 답장을 받는 날이 올 거예요. 멀지 않은 날에요.

영화 칼럼니스트 이하영 ha02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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