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설계자>▲ 영화 <설계자> 스틸컷ⓒ (주)NEW
29일 개봉한 영화 <설계자>는 의뢰받은 청부 살인을 사고사로 조작하는 설계자 영일(강동원)이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범죄의 여왕>으로 탄탄한 짜임새의 이야기를 풀어냈던 이요섭 감독의 두 번째 영화다. 정 바오루이 감독의 <엑시던트>를 한국식으로 리메이크했다. 원작은 끈적거리는 스릴러이나 리메이크인 <설계자>는 전혀 다른 결말과 차갑고 건조한 분위기로 의뭉스러움의 볼륨이 커졌다.
청부 살인을 사고사로 위장하는 업체 삼광보안의 대표인 영일은 재키(이미숙), 월천(이현욱), 점만(탕준상)과 일한다. 사람을 죽이고 돈을 버는 죄책감 따위는 없다. 철저한 사전 준비와 계획을 통해 깔끔하게 일을 처리해 업계의 인정도 받고 있다. 하지만 최근 짝눈(이종석)의 죽음이 계획되었다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어 혼란스러운 가운데 새로운 일을 의뢰받아 다시 분주해졌다.
이번 타깃은 모든 세상이 주목하는 검찰총장 후보 주성직(김홍파)이다. 그의 딸 주영선(정은채)은 엄마에 이어 자신까지 조종하려 드는 아버지를 제거해 달라는 섬뜩한 제안을 한다. 누가 무엇을 부탁하든, 묻는 건 예의가 아니다. 오로지 사건을 우연한 사고로 만들기 위한 증거를 준비하는 데만 치중한다. 쥐도 새도 모르게 타깃을 제거하기 위한 설계 작업을 시작하던 중 생각지도 못했던 위험한 일들이 벌어진다.
우연한 사건은 사고가 될 수 있을까?
▲ 영화 <설계자> 스틸ⓒ (주)NEW
영화는 음모론을 소재로 언론, 유튜버를 향한 경각심을 세운다. 정보과다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묵직한 고뇌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상황을 영일의 혼란으로 빗대었다. 어린 시절 함께 한 친구 짝눈의 미심쩍은 사고가 트리거가 되어 뭔지 모를 정체를 쫓아 스스로를 좀먹어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영일의 거듭된 불안과 의심을 관객도 함께 모호함을 경험하도록 했다. 영민한 사람이었지만, 짝눈에 이어 주변의 사고가 거듭되자 주인공은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결국 본인이 타깃이 되었다고 생각하자 걷잡을 수 없는 미궁 속에 빠져 갈피를 잡지 못한다. 영일이 꾸린 작은 청부살인 업체 삼광보안 팀원은 이름, 나이, 출신 등 세상에 기록되지 않은 무연고자다. 일명 깡통이라 불리는 사람들로 언제 어떻게 죽어도 세상에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는 사람들이다.
상황은 점점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을 강력한 소용돌이 속으로 안내한다. 자극적인 이슈를 생산하는 '사이버 렉카' 유튜버, 수많은 눈과 귀가 되어주었지만 사실 여부를 파악하기 힘든 언론, 모든 세상을 체스판의 말처럼 움직이고 통제하는 청소부까지. 영일이라는 차갑고 삭막한 인물이 변해가는 감정의 속도와 일치한다. 사건을 사고로 위장하기 위해서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으며, 좋은 팀워크만큼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할 이들의 업무의 속성은 심리 변화로도 쉽게 흔들린다는 점이다. 거짓말이라고 추측하면서 내부 분열이 일어나고 청소부에 집착하다 끝내 파멸한다.
▲ 영화 <설계자> 스틸컷ⓒ (주)NEW
점점 피폐해져만 가는 마음과는 반대로 청소부의 실체는 끝끝내 보여주지 않아 의심이 커진다. 누구도 제대로 본 적 없지만 있다고 믿는 외계인, 귀신 등을 믿고야 마는 절실한 상황을 떠올려 보게 한다.
19세기 독일에 나타났던 정체불명의 인물 카스파 하우저에서 따온 유튜버 '하우저'도 의미심장하다. 청소부는 피상적 존재로 그려지지만 영일이 존재 여부를 의심하면서 관객의 마음까지도 흔들어 놓는다. 영화가 끝난 후 진실이 무엇인지 각자의 의견이 분분할 것 같다.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해 볼 만한 열린 결말이다. 최근 개봉한 <댓글부대>와 비슷한 분위기와 결을 공유하고 있다.
다만, <범죄도시> 시리즈처럼 사이다 결말을 원한다면 다소 답답할 수 있겠다. 진실을 알고 싶어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무기력함이 전해진다.
그러나 매력적인 캐릭터의 등장으로 시선 강탈은 물론 이야기에 집중할 여지는 충분하다. 청부살인을 업으로 삼는 삼광보안의 팀원은 각자 결핍을 가졌다. 이 결핍을 이용해 회사를 굴리는 영일을 비롯해, 월남전 사연을 입에 달고 사는 재키, 트랜스젠더가 되고 싶어 돈이 필요한 변장술사 월천, 아이 아빠인 점만이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절실함이 기묘한 팀워크를 이뤄낸다.
또한 대사를 쏟아내기보다 눈빛, 표정으로 고뇌하는 캐릭터를 표현한 강동원의 성장이 돋보이는 영화다. <눈물의 여왕>의 모슬희와 전혀 다른 이미숙의 낯선 변신도 눈여겨볼 만하다.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노하우와 독보적인 아우라를 풍기며 신 스틸러로 활약한다. 특히 중성적인 외모로 신선한 충격을 준 이현욱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유이 역의 박정민이 떠오르는 파격적인 연기로 시선을 강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