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 딸과 아내 잃은 남자, 운전대를 놓을 수 없는 까닭

3377TV정보人气:36시간:2024-11-05

[넘버링 무비 410] 영화 <디 애프터> 영화 <디 애프터> 스틸컷ⓒ 넷플릭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영화 <페이퍼보이 : 사형수의 편지>(2013), <버틀러 : 대통령의 집사>(2013), <모스트 바이어런트>(2015) 등 배우 데이빗 오예로워를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영화는 여럿이지만 역시 <셀마>(2015)의 마틴 루터 킹을 빼놓을 수는 없다. 셀마 몽고메리 행진을 바탕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그는 흑인 인권운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추앙받는 인물을 연기하면서도 그 존재감이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역사의 한편을 짊어질 수 있는 배우에게는 분명 특별한 무엇이 있다.

앞서 언급했던 작품들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지만,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전기 영화를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인지 모른다. 주연이 아닌 조연을 맡았던 작품 또한 마찬가지다. 우간다의 악명 높은 독재자 이디 아민을 그려낸 <라스트 킹>(2006), 전설적인 재즈 싱어 니나 시몬의 일대기를 담은 <니나>(2016)와 같은 영화가 여기에 속한다. 전기물이 쏟아지던 2010년대 중후반의 시대적 분위기도 분명 영향을 줬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여러 작품에서 서로 다른 인물을, 그것도 영화의 전면에 세워져 소비되었음에도 그의 이미지가 한 번도 혼동되거나 뒤섞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극영화에서도 그의 존재감이 희석되지는 않는다. 장르도 꽤 다양한 편이다. 그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2002)라는 코미디 장르의 작품이었다. 교도소 내에서 오페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담았다. <모스트 바이어런트>(2015)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드라마 장르에 뛰어들기 시작한 그는 <파이브 나이츠 인 메인>(2015)에서는 상실의 아픔을 겪는 인물을 연기했고, <오직 사랑뿐>(2018)에서는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컴어웨이>(2022)를 통해 판타지 장르까지 영역을 확장한 그의 다재다능함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영화 <디 애프터>는 그런 그의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자신의 연기 하나만으로 극 하나를 완성할 수 있는 단단한 배우의 내공이다.

02.
영화 <디 애프터>는 한 남자(데이비드 오예로워 분)와 그의 딸 로라(아멜리 도쿠보 분)의 행복한 모습으로 시작된다. 공유 차량을 운전하고 있는 그는 할당된 업무로 인해 지난 몇 주간 아이가 열심히 준비한 공연에 참석하지 못할 예정이다. 로라도 아빠의 그런 사정을 아는 모양. 엄마 아만다(제시카 플러머 분)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만난 공원 한구석에서 오늘 공연에서 선보일 춤을 아빠에게 보여준다. 충만한 사랑과 애정으로 반짝거리는 오프닝 신. 느닷없이 찾아온 행복은 종종 쉽게 깨져버리곤 한다. 프레임을 깨뜨리며 등장한 괴한의 공격. 남자는 딸과 아내를 순식간에 잃고 만다. 환한 대낮에, 확 트인 공원에서,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하필.

이제 영화의 제목이 가진 뜻을 알 것 같다. 남자가 지금 처한 모습, 앞으로 살아가게 될 날들을 함축적이지만 직관적으로 담은 표현이다. 이제 남는 것은 시작점에서 천명하듯 밝힌 작품의 목적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다. 물론 그 중심에는 예상하지 못한 상실, 가장 행복해야 했을 순간에 끔찍한 비극을 맞이한 남자, 그를 연기한 데이비드 오예로워가 있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한번 자신의 목적에 온점하나를 찍는다. 런던 중앙 형사 법원에서 나온 살인 사건의 유죄 판결, 흉기를 휘두른 남자로 인해 네 명이 사망하고 여럿이 다친 사건에 대한 평결을 발표하면서다.

그동안 시간이 조금 흐르기는 했지만, 가족의 형태와 그 형상이 간직하고 있던 온기를 한순간에 빼앗아버린 날에 대한 세상의 판단은 어떻게든 매듭지어진다. 남자의 오늘과는 다르다. 그날 이후 남자가 가족을 기억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겨진 녹음 메시지로 가족의 목소리를 반추하는 일과 닿지 않는 사진 속 얼굴을 매만지며 촉각을 꼿꼿이 세우는 일이다. 여전히 존재의 부피를 키우는 것은 슬픔과 절망뿐. 눈물이 계절의 수확물처럼 남는다.

 영화 <디 애프터> 스틸컷ⓒ 넷플릭스
03.
"난 지금도 매일 얘기해. 걔는 절대 못 누릴 삶이 아쉬울 뿐이야."

미산 해리먼 감독은 남자의 내면을 축적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의 직업을 활용한다. 공유 차량을 운전하는 일이다. 그는 상실의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붙잡고 있는 일상에서 타인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화목한 모습의 부자(父子), 아버지가 위독한 상황에 놓인 듯한 가족의 다급한 순간, 그리고 일상에 지친 누군가의 시간까지. 운전석의 백미러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승객의 모습 속에는 다양한 형태의 감정과 인생이 녹아있다. 남자의 삶도 그중 하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렇다.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면 분명히 다른 모습과 태도를 보이겠지만.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노부부는 여전히 그 순간을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 그 모습 또한 어깨 너머로 남자가 바라본 풍경이다.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해 극이 완성할 수 없는 서사를 영화가 대신 쌓아가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극의 중심이 되는, 가족을 잃은 남자의 삶 또한 하나의 모양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분명 가볍지 않은 사건이다. 경험하지 않아도 좋을, 모두가 하지는 않는 형태의 사고. 하지만 우리는 모두 이 삶 속에 주어지는 일들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 남자는 물론, 그의 차량 뒷좌석에 앉은 승객 모두에게 동일한 명제다. 이 사실이 남자 개인의 삶에 위로가 될 수는 없겠으나, 조금은 더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줄 것이다.

또 하나는 남자가 승객들의 삶을 백미러 너머로밖에 지켜볼 수 없었던 것처럼 이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비극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 역시 그 지점에서 더 나아갈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두가 마찬가지다. 인간은 사회성 동물이라 타인의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하며 살아가지만, 어느 지점 이상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 마음의 크기나 방식의 문제는 아니다. 형태적으로 독립적일 수밖에 없기에 경험은 공유될지언정 완전히 전이되거나 전사될 수 없어서 생기는 한계다. 이 작품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히 한다.

04.
차량을 운전하는 남자가 가진 두 가지 장치 위에서 또 다른 한 가족이 등장한다. 사소한 일로 크게 다투는 부모와 그들 사이에 앉은 딸이다. 이런 상황을 겪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만 응시하는 그는 운전석의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도 별 반응이 없다. 집에 도착해서도 부모의 다툼은 멈출 줄 모르고, 딸은 차량에 그대로 방치된다. 앞서 다른 승객이 보인 삶의 모양이 그랬듯이 이런 가족의 모습도 있다. 아내와 딸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남자는 이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다툼 사이로 소녀가 남자의 등 뒤로 다가와 꼭 끌어안는다.

남자의 자동차 백미러 너머 존재가 처음으로 그 경계를 지나 의미상으로 닿게 되는 장면이다. 소녀의 행동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극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추측을 하더라도 이 행위가 남자에게 줬을 감정적 동요는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다. 드라이버와 승객은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 있지만 완전히 다른 영역에 놓인 존재와 같고, 이는 남자가 보냈을 지난 모든 시간과도 일치할 것이 분명하다. 환영처럼 나타나는 잊을 수 없는 그날의 기억과 어떤 날들 속에서도 이제 혼자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영화 <디 애프터>는 다시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그림자 아래의 감정이 먹먹히 스며오는 작품이다. 상실은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대상을 상실한 존재는 그 자리에 오래 머물게 된다. 그런 존재와 자리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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