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만큼 장소를 사랑할 것
19살에 처음 발딛었던 영화제의 설렘을 기억하면서 때마다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내려오는 도시. 부산은 <D.P.> 시리즈를 준비하면서 한준희 감독이 자연스럽게 작품의 무대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장소다. 지금은 사라진 순대국밥집의 추억부터 시즌1의 클라이맥스를 책임진 방공호의 비밀까지, 한준희 감독의 프레임에 담긴 <D.P.> 속 부산의 풍경을 소개한다.
- <D.P.>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부산 로케이션을 염두에 뒀다고. 이유가 궁금하다.
아무래도 부산국제영화제의 영향이 큰 것 같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매년 영화제에 갔고 활동가로도 일했으니까.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로케이션의 그림을 그릴 때 부산의 장소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부산에 가서 대본을 쓴다. 모든 작가가 그럴 텐데 글 쓰는 건 언제나 어렵고 힘들다. 스스로 돈과 시간을 들여서 부산까지 가서 글을 쓰겠다고 폼을 잡고 앉아 있어야 뭐라도 끝내고 돌아올 수 있는 이유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못 쓰고 돌아오면 나는 부적격자, 라는 마음으로 쓴다. (웃음) 스스로에게 부담감을 지우려고 내려가지만 일단 부산역에 도착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영화제의 기억이 몸 안에 남아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준호와 호열이 부산에 처음 내려가서 시티투어 버스를 타는 장면에서도 이런 기분좋음을 담고 싶었다. 어쩔 수 없이 무거움을 갖고 가는 극이기 때문에 긴 호흡의 시리즈에서 한번씩 숨 쉴 수 있는 즐거운 변주를 주는 방식이다.
- 부산에서 촬영한 장면 중 시각적으로 가장 만족스러운 곳은 어디인가.
<D.P.>가 액션 블록버스터를 추구하는 작품은 아니다. 두 캐릭터의 관계성을 바탕으로 아기자기한 재미도 추구하지만 동시에 추격전의 장르적 면모도 보여주어야 했다. 시즌1에서 이 묘미가 잘 드러나는 장면이 옥상에서의 추격 신이라고 봤다. 옥상 로케이션이 대단히 중요했다. 여러 옥상을 넘나드는 동선이 핵심이었기 때문에. 영도에서 찾은 영선미니아파트는 옥상 부감이나 풀숏의 느낌이 모두 만족스러웠다.
- 수백 세대가 사는 아파트다. 현실적으로 촬영 여건이 쉽지만은 않았겠다.
특히 제작팀이 한달 전부터 주민들을 만나면서 양해를 구하고 가까워지는 등 노력을 많이 했다. 그만큼 장면이 잘 찍혀서 무척 만족스러웠다.
- 옥상 미술에 있어 구체적으로 주문한 점이 있나.
긴박한 장르적 액션이지만 그런 와중에 실생활의 디테일이 보였으면 했다. 최초 헌팅 단계에서부터 이런저런 구상을 스태프들과 나눴다. 이쪽에 빨랫줄을 두면 좋겠다, 여기 개 한 마리가 있으면 어떨까, 혹시 저쪽에 몰래 담배 피우던 여고생이 서 있다가 준호와 호열을 보고 깜짝 놀라 욕을 해야 하나, 하는 식의…. (웃음) 생활에 밀착되어 있는 추격 신이 내 목표였다. 웃기기도 하지만 우습지 않은 톤으로. 이런 아이디어를 배준수 미술감독이 구체적으로 구현해주었다.
- 김동민 프로듀서와 배준수 미술감독도 영도의 영선미니아파트를 가장 핵심적인 로케이션으로 꼽았다.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에 아파트 내부 세트를 지을 때 실제 영선미니아파트와 실측 사이즈까지 동일하게 지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굳이 달라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로케이션과 세트 사이의 밸런스, 혹은 연결성이 맞아야 배우와 스태프 모두에게 좋다. 실내 세트가 됐건 오픈세트가 됐건 나와 미술감독 모두 비슷한 기조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 내부에 지은 영선미니아파트 세트는 카메라와 조명의 위치를 고려해 실측보다 살짝 넓게 만들어진 부분이 있기는 할 텐데, 그래도 거의 흡사할 것이다. 리얼과 리얼리티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D.P.>의 인물들에게 벌어지는 이야기는 리얼로 따지기에는 드라마틱하고 장르적인 일들의 투성이다. 하물며 준호에게 영옥 같은 여자가 나타난다는 것까지도…. (웃음) 하지만 장르적인 해프닝이 벌어지더라도 그들이 발딛은 공간은 로케이션이든 세트든 리얼리티를 확보해야 한다. 거기서 밸런스가 나온다.
- 부산의 오래된 동네가 담고 있는 소박함, 생활감이 시리즈 안에 담담하게 묻어난다. 이방인으로서 이 도시를 오랫동안 방문하고 애정해온 연출자의 시선이 효과를 낸 것 같다.
로케이션에 애정이 있어야만 잘 나온다고 믿는다. 감독이 배우에게 애정을 갖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십수년간 부산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산책을 하고 영화를 보고, 그 틈새에 이곳저곳에서 영화를 찍으면 좋겠다고 구상하는 시간들이 작품에 묻어나오면 좋겠다.
- 정해인 배우는 <D.P.> 시즌1을 통해 부산에서 처음 작품을 촬영했다고.
맞다. 우선 나와 프로듀서가 맛집을 최대한 많이 소개해줬다. (웃음) 나도 과거에 그런 시절이 있었다. 윤종빈 감독이 부산 사람이기도 하고 맛집을 워낙 잘 아니까 “해운대에서 돼지국밥을 먹으려면 유명한 데 어디어디 가지 말고 꼭 여기를 가야 한다” 하는 식으로 배웠다. 지방 로케이션에 오래 있으면 서로 더 돈독해진다.
- <D.P.>팀은 시즌1 촬영 당시 부산에 얼마나 머물렀나.
한달 정도 합숙했다. 전체 촬영의 한가운데쯤이었다. 서울에 돌아가면 가장 힘든 5, 6부 촬영이 남아 있는 시기였는데 부산에서 서로의 관계가 더 견고해져서 오히려 걱정이 줄었다.
- 시즌1 초반에 주인공 준호의 중요한 감정적 전환점이 되는 국군 병원 신을 부산대학교 캠퍼스에서 찍은 이유는.
준호가 성우를 쥐어패면서 감정을 드러내는 정말 중요한 장면이다. 이 장면이 시청자들에게 납득이 되고 공감이 돼야 이후 에피소드를 쭉 따라갈 수 있는 동력이 생긴다. 그래서 국군 병원 앞 로케이션을 찾는 데 긴 시간 공을 들였다. 뭐랄까, 더 리얼한 공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부산대학교 캠퍼스에 마련된 건물 출입구의 구조가 특이했다. 뒤편의 넓은 콘크리트 벽을 따라 걷는 그림도 좋았다. 거친 회색의 콘크리트가 핵심이었다. 사실 일정상 촬영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곳이었지만 인근의 다른 데를 찾지 않고 세팅이 가능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촬영을 진행했다.
- 부산에서 꼭 필요한 로케이션이라 일정이나 동선 등이 다소 비효율적이라도 고집한 곳이 또 있을까.
마지막 6부의 방공호 터널이 그랬다. 조석봉(조현철)을 추격할 때 가장 중요한 무대가 되는데, 그 입구를 부산에서 찍었다. 부산아시아영화학교 근처에 있는 ‘충무시설’이라는 벙커였다. 내부는 충주에서, 터널로 빠져나온 장소는 강원도 정선에서 찍었다. <D.P.>는 코로나19로 인해 후반부는 촬영하면서 바꾼 것도 많았다. 전철역, 기차역 같은 공공장소는 모두 포기했다. 가능한 선에서 대본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좋은 로케이션을 얻을 때도 있었다. 상황에 맞게 항상 최선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 장소의 영향을 받아 시나리오나 당일 촬영분을 수정하기도 하나.
모든 작품의 콘티 준비를 열심히 하지만 콘티는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현장에서 배우들의 동선이나 연기의 디테일이 바뀌는 것처럼 로케이션지의 어떤 풍경, 분위기, 공기, 그리고 날씨에 따라 장면의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다고 믿는 쪽이다. 그게 애니메이션과 다른 점이기도 할 테고. 나는 그 편이 훨씬 재미있다.
- 번화가 촬영을 사하구 하단동에서 진행했다. 실제 번화가에서 배우들과 호흡하는 과정에서 인상적인 경험이 있었나.
사람들이 정말로 생활하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배우가 놓이면 분장, 의상의 위력보다 더더욱 진짜라고 믿게 되는 힘이 나오는 것 같다. 로케이션을 선호하는 이유에는 물론 효율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배우들이 자기가 맡은 인물로서 비로소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욱 좋다. 그리고 배우들을 위해서라도 가급적이면 실제 거리에서 진짜 동선을 만들어주고 싶다.
- 시즌2에선 극 중 인천 장면을 부산 다대포항에서 찍었다. 홍콩영화의 배경 같은 부둣가가 배경이다.
좋아했던 홍콩영화의 분위기, 누아르적 뉘앙스를 주고 싶었다. 누군가 밀항을 하고 밀입국을 할 만한. 시즌2에서 공들인 건, 탈영병 장성민(배나라)이라는 인물을 쫓아가다가 그의 죽음까지 가게 되는 과정이다. 인물의 죽음은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도 힘들다. 왜 꼭 죽어야 하나, 이 죽음으로 보는 분들은 무엇을 느껴야 하나. 고민도 깊어진다. 인생의 어느 실패 회로에 빠진 인물의 궤적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짧지만 거대한 액션이 들어가다보니 특정 신에서만 장르의 결을 명확히 보여줘야 했다. 에피소드 전체가 아니라 해당 신에서 톤이 달라지는 경우에는 로케이션이 만들어주는 분위기를 극대화해야 한다.
- <D.P.> 시리즈를 준비하며 부산 일대를 둘러보았을 텐데, 영화 로케이션으로서 부산이 가지는 특유의 정취는 무엇이라고 느꼈나.
한마디로 말하자면 생기다. 부산만의 생기가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항구도시는 장르적 무대가 되곤 한다. 하나의 메타포가 되기도 하고. 부산은 오래된 항구도시이자 클래식한 원도심들의 색채가 잘 보존된 곳인 동시에, 최첨단의 마천루가 빠르게 올라가는 도시이기도 하다. 구도심과 신도심의 갭이 만들어내는 그림도 흥미롭다.
- 부산이라는 지역과 작품 내적으로 가장 호응하는 캐릭터를 꼽아준다면.
호열이겠지. (웃음) 정확히 말하면 호열이자 구교환 배우. 모니터 너머로 슬쩍 보아도 구교환 배우가 부산 촬영 때 진심으로 신이 난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봤다. 교환이 형도 부산국제영화제에 독립영화를 만들고 출연하던 시절부터 추억과 애정이 많은 사람 아닌가. 어떤 때는 마치 구교환이 정해인에게 부산을 소개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특히 구교환 배우가 버스에서 내려 갑자기 부산 갈매기를 몸으로 흉내내던 애드리브가 기억난다. 감독이 제안한 디렉션의 범주 내에서 창의력을 발휘하면서 스스로 연출할 수 있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신선한 표현들을 보여주지만 단 한번도 감독이 원하는 방향에서 엇나가지 않는다는 점이 신기하다.
- 혹시 앞으로 또 부산을 주무대로 촬영하고 싶은 아이템이 있나.
장르색이 옅은 담담한 드라마는 어떨까. 대단히 평범한 사람들이 나오는. 그곳에서 밥 먹고 매일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D.P.>가 결국은 외지인들이 부산에 가서 벌어지는 이야기 아닌가. 부산이 터전이고 생활인 사람들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은 또 다를 것이다. 꼭 부산이 아니더라도, 그곳이 전주든 어디든 지역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현실적인 드라마를 꼭 한번 작업해보고 싶다.
- <D.P.> 시리즈를 완성하고 꽤 시간이 흘러 진행한 인터뷰가 됐다. 지금 돌아보건대 이 시리즈가 연출자 한준희에게 남긴 흔적은 무엇인가.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개인적인 의미로는 <D.P.>를 찍으면서 마흔이 됐다. <차이나타운>으로 데뷔한 게 30대 초반이었으니까… 언젠가부터는 청춘이라는 말을 쓰기가 조금 민망한데, <D.P.>가 내게 청춘을 바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 내가 전보다 더 숙련될 수는 있겠지만, <D.P.>는 그 시기의 나였기에 만들 수 있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전보다 어떤 책임감이나 사명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지금의 상태도 잘 다뤄나가고 싶다. 또 다음 방향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 앞으로도 시나리오가 잘 안 풀릴 때 부산에 내려가 작업할 것 같은가.
지난주에 <파일럿> 무대인사 끝나고 혼자 해운대 앞 카페에서 쓰다왔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