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 407] 영화 <폭설>▲ 영화 <폭설> 스틸컷ⓒ 판씨네마(주)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영화 <폭설>은 윤수익 감독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돼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 작품을 처음 시작할 때 사랑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고 말한다. 찰스 부코스키의 소설 <일상의 광기에 대하여>에 실린 단편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이후의 일이다. 자신의 외적인 아름다움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의 고정된 시선과 기대하는 모습, 스스로의 어긋난 내면의 간극 때문에 자멸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이 부분을 현시대와 대중이 연예인이라는 대상을 바라보는 편견으로 이어보고자 했다.
시작은 동명의 단편 영화였다. 먼저 캐스팅이 확정돼 있었던 수안 역의 한해인 배우와 함께였다. 눈이 많이 내린다는 배경 설정은 유사했지만 극이 나아가는 방향은 달랐다. 자신의 꿈속에서 잃어버린 사랑을 찾는,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경험하는 인물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어떤 해석을 하기 위해 지금 이런 말들을 꺼내고 있는지 이미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한소희 배우가 설이를 연기하고, 한혜인 배우가 수안이라는 인물로 녹아들며 완성된 장편 영화 <폭설>은 분명히 그런 영화다. 갑자기 쏟아지는 많은 눈 속에서 서로를 마주했던 두 인물이 이제 찾을 수 없는 누군가의 흔적을 그리고 있는, 꿈속을 헤매고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
영화는 세 개의 작은 막(Act)으로 구성돼 있다. '설'과 '수안', 그리고 '바다'다. 이 중 극중 인물의 이름으로 명명된 '설'과 '수안'의 챕터는 서로 마주 본 상태로 놓인다. 각각의 구성이 기승전결과 같은 서사의 흐름을 위해 계획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서사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설'에 해당하는 이야기만으로도 영화는 완성할 수 있다. 이 작품에 놓인 과제는 뒤따르는 '수안'과 '바다'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설'이다. 여기 첫 번째 막의 화두를 어떻게 이끌어내느냐에 따라 영화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게 된다.
02.
수안(한해인 분)과 설(한소희 분)은 학교의 연극 수업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전학생에게 유난히 텃세가 심한 학교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다. 수안이 설을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는 이미 드라마의 주연을 맡았을 정도로 유명한 연예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수안은 아직 학교에서 학생들이 연출하는 작품조차 한 번 출연한 적이 없다. 영화는 두 인물을 동등한 입장의 학생인 것처럼 바라보고자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조금 더 정확히 하자면, 수안은 유명한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으면서도 예쁘지 않은 얼굴 탓에 진짜 배우가 될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대신 감독이 돼 자신이 그리고 싶은 이야기를 직접 찍어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대중 앞에 설 수 없다면 그 뒤에서라도 카메라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반대로 설은 열 살 때부터 해온 방송일 탓에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에만 매달렸다. 자신이 가진 예쁜 얼굴로 어른들이 원하는 값어치만 하면 되는 삶이었다. 그 결과 주어진 배역만 생각하느라 정작 자신이 누군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인물은 자신이 머무는 세상으로부터 영향받는다.
인물 사이에 발생하는 입장의 거리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요소다. 서로의 입장을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설'에서는 갈등을 발생시키고 두 가지 거짓말을 낳게 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이제 두 사람의 관계는 평범한 삶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인물과 그런 인물이 가진 반짝이는 세상을 동경하는 인물로 결정지어진다. 서로의 세계를 동경하는 두 인물이 외부의 배척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게 되는 일. 심지어 그 감정이 우정보다 더 깊은 내밀한 것이라면 어떤 모양이 될까. 영화는 닿을 듯 닿지 않는 점 하나를 향해 두 인물을 내몰기 시작한다.
▲ 영화 <폭설> 스틸컷ⓒ 판씨네마(주)
03.
"멜로 영화 찍자. 그래서 우리 둘이 간직하는 거야.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말고."
사랑의 처음에는 낯설고 두려운 지점이 존재한다. 자신의 내면조차 정확히 바라보지 못하는 두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러한 태도가 마음을 알아차릴 수는 있지만 온전히 잠길 수는 없게 만든다. 설과 수안의 키스는 사랑의 표현과 교류가 아닌 검증과 확인에 가깝다. 두 사람이 양양을 떠나 서울로 향했던 밤의 일이다. 이 행위에는 서로에 대한 마음을 판명하는 일 이상의 의미도 있다. 지금 주어진 세계를 모두 내려놓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동경하던 세상을 마주했을 때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동일한 신 안에서 설은 수안이 찍는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약속한다. 수안도 설의 행위에 동조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세상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는 만큼만, 딱 그 정도만 상대를 향한 거리를 좁힌다. 그나마 설이 한 발 더 먼저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상대적으로 그만큼 높은 곳에 서 있었던 경험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두 사람의 태도는 또 다른 상황, 유사한 의미를 가진 장면을 통해 또 한 번 그려진다. 숨겨진 시간의 틈 속에서 연기 연습을 그만두지 못하는 수안과 대중으로부터 잊혀지는 것이 두려워 다시 대중의 시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설의 모습이다.
누가 봐도 멜로인 관계인데 아닌 척을 한다는, 영화를 함께 찍겠다고 약속하고 다시 연예계로 돌아가 버렸다는, 두 거짓말은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 사이에 남게 된다. 사실은 처음부터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결말이다. 두 사람이 나누던 입맞춤과 달콤한 언어들은 이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 위에 남겨지는 것은 이제 사라져 버린 설의 흔적과 처음 모습 그대로 다시 혼자가 되어버린 수안의 공간이다.
04.
남은 것은 '수안'과 '바다'의 챕터다. 두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설'과 마주하는 자리에 있는 '수안'에서 그려지는 것은 자신의 소원대로 배우가 된 수안의 모습이다.
그는 과거 설이 경험했던 삶을 체득하며 그때는 알지 못했던 설과의 간극을 조금씩 줄여나간다. 보이는 것에만 기대 환상처럼 생각했던, 원하고 바라기만 했던 삶의 밑바닥이다. 배역을 얻기 위해 해야 하는 일들, 상태와 무관하게 어디서든 알아보는 사람들, 심지어 스스로 형편없는 연기를 하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멈출 수 없다. 같은 자리에 섰을 때만 보이는 것이 있다.
다시, '설'의 마지막에서 설은 떠났다. 이제 수안은 같은 세상에 발을 딛을 수 있게 됐지만 그를 찾을 수 없다. 지인을 통해 구한 약물에 기대어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서 과거의 바다를 잠시 다녀올 뿐이다. 다녀온 것이라 믿을 뿐이다. 그런 수안의 행동으로부터 느껴지는 것이 있다. 상실의 기운이다. 그가 가진 마음의 모양은 반드시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 위에서는 가질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분명 되돌려 줘야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태에 놓인 존재는 반드시 무너진다.
설은 분명 세 번째 단락인 '바다'에서 등장한다. 그의 존재적 여부, 행방에 대한 해석은 지극히 개인의 것이지만, '수안'의 이야기에서 그의 상실을 확인한 이들에게 이후에 남은 양양 바다의 이야기는 바람과 상상, 그리고 아직 약기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심상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마지막 이야기 속에서 두 사람은 파도에 휩쓸리고 폭설이 내린 언덕에 표류한다. 갑작스럽게 시작되는 눈싸움과 이제 완성되는 상호 감정의 교합마저 모든 것들이 유기적이지 않고 눈덩이처럼 뭉쳐진 느낌이다. 무엇보다, 실재하는 설과 수안의 기적적인 만남이란 너무 구태스럽다.
▲ 영화 <폭설> 스틸컷ⓒ 판씨네마(주)
05.
"다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이 사실은 너의 것일 수도 있어."
우리는 관계의 맺고 끊음을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느닷없이 찾아와 천천히 물드는 관계도 분명히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되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게 되는 인연. 두 사람도 마찬가지다. 처음 만났던 장면에서 찰나의 순간에 눈짓을 보내던 설의 모습이 수안의 삶을 붙들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사라진 존재라고 해서 현재의 인물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갑자기 내린 많은 양의 눈, 폭설. 수안에게 다가온 설의 존재가 마치 그런 순간이지 않았을까.
영화 <폭설>은 스크린 위 표상 아래에 깊이 파묻힌 작품이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이야기, 두 인물의 등 뒤에 감춰진 맥락을 따라 자신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고 나서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것을 단순히 친절하지 않다거나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내뱉기 쉽고 가벼운 말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관계의 위치와 인물의 심리를 이미지로 치환하는 과정에 감춰진 의미를 우리는, 소복이 쌓인 눈이 녹아내릴 때까지 몇 번이고 되뇌며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